아베의 용미탈미(用美脫美), 미국은 알고 있나

주간조선 2015/10/05-11(pp.33-35)에 기고한 이영일의 글입니다.

日 안보법 통과되던 날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전 국회의원  

▲ 지난 9월 18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안보법안 무효화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연합
필자는 지난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4박5일간 아베(安倍晉三) 정권의 안보 관련법 제정을 놓고 전개되는 일본 여론의 흐름을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의 도쿄와 동북지역 중심도시인 센다이,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폭이 낙하된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아베 정부가 제출한 안보 관련 11개 법안들은 필자가 귀국하기 전날인 9월 19일 오전 일본 참의원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이 수적 우세로 밀어붙여 날치기 통과되었다. 이 법안들은 지난 8월 중의원 통과에 이어 이날 148 대 90으로 참의원에서 통과됨으로써 입법절차가 완결되었다.
   
   필자는 도쿄에 도착한 당일 먼발치에서 국회의사당 앞의 시위를 지켜보았고 TV와 신문을 통해 시위 관련 뉴스를 접하면서 일본 여행의 두 번째 정착지인 센다이로 이동했다. 도착 당일 밤 센다이 시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대를 만났다. 필자는 우선 안보법 반대시위자들의 표정과 구성에 놀랐다. 일본 기상청이 태풍 19호로 센다이 지역에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우비를 입고 수백 명의 시위대가 센다이 광장으로 질서 있고 진지하게 몰려가고 있었다. 광장에는 모리야 가스히코(守屋克彦)라는 전 재판관이 마이크를 잡고 서서 “다수결의 힘을 무기로 삼는 오늘의 정치는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서 “평화헌법에 위배되는 안보법률들은 통과되어서는 안 되며 일본 국민들은 너나없이 호헌투쟁에 동참하라”고 호소했다. 이 사람은 안보법 제정 반대를 청원한 법관 75인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센다이 대학생들과 젊은 주부들이 많이 참여했고 한때 우리나라에서 ‘넥타이 부대’라고 알려진 샐러리맨들도 다수 참가하고 있었다. 한 시위 참가자는 “안보법에 반대한다는 의사표시를 하기 위해서는 시위에 참가하는 도리밖에 없어 귀가하지 않고 여기 왔다”고 말했다. 센다이에서 사업을 하는 필자의 지인은 “센다이 같은 지방에서는 중앙정치 문제 때문에 시위하는 일이 드문데 이번에는 시위가 크고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 TV들은 매시간마다 안보법 관련 참의원의 동정을 알리면서 찬반 관련 인사들의 의견을 인터뷰를 통해 가감 없이 보도했다. 오사카의 한 여성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왔는데 참가 이유를 물은즉 자기도 안보법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싶은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유모차를 끌고 그대로 시위현장으로 나왔다고 했다. 법안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중국이 힘만 믿고 센카쿠열도를 위협하고 중국 해적들이 일본 어로수역에 마구 출몰하는데, 미국에만 안보의 모든 책임을 맡기고 우리가 손놓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안보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그간 미국에 안보를 맡겨왔지만 지금 미국 형편도 국방비를 감축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동맹국들끼리 후방 지원의 길을 열어 협력하는 것이 미·일동맹을 더 강화할 것으로 보아 안보법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들 중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위협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수였고 주로 중국의 위협을 안보법 지지의 명분으로 삼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헌법 9조는 240만의 죽음과 바꾼 것”
   
   지난 9월 18일 아침 아사히신문은 다스미 요시코(辰己芳子)라는 90세 일본 여성 요리전문가의 칼럼을 게재했는데 글에 담긴 메시지가 읽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 여성은 시집온 지 10일 만에 남편이 군에 입대하고 필리핀전투에서 사망한 후 혼자 살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자기가 조사한 바로는 제2차 대전으로 사망한 일본군 총 240만명 가운데 30%는 전투로 죽었고 나머지 70%는 작전 실수나 보급로 차단 등으로 굶어죽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음을 통계로 밝히면서 일본 평화헌법 9조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240만명의 억울한 죽음과 맞바꾼(引換) 피의 대가라면서 헌법 수호를 간절히 호소했다.
   
   도쿄를 중심으로 수도권에서 전개된 시위는 하나같이 아베 정권의 위헌 규탄이 주를 이루었다. 일본에서 최고재판소의 판사를 거친 법조의 거물들은 하나같이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지 않고 내각의 이른바 ‘헌법해석’을 개헌으로 간주, 헌법에서 수권되지 않은 안보 관련법을 제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데 거의 이론이 없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일본의 국내외 정치 상황에 비추어 개헌과 같은 국내 절차를 하나씩 밟아나가면서 내외의 도전을 극복하기가 힘든 상황으로 보고 안보법 제정을 결단했다고 한다. 그러면 안보법을 밀어붙이는 아베의 생각은 무엇일까.
   
   우선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일본 경제가 회생하기 위해서는 아베의 경제 살리기(아베노믹스)를 성공시켜야 하는데 성공의 조건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미국의 협력을 얻어 엔화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대륙에서 잠재적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에 편승, 필요한 협력을 일본이 미국에 제공해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구하는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전략의 큰 축을 일본이 맡아주자는 것이다. 아베는 미국 의회에서 국방비를 2011년부터 향후 10년 동안 6000억달러 삭감해야 한다는 시퀘스터(Sequester)법안이 통과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정부와 교섭을 개시, 지난 4월 미국과 일본 간에 집단자위권 행사를 핵심으로 하는 방위협력지침(통칭 가이드라인) 개정에 합의했다. 그는 그 대가로 미국 국회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하고 미국 상하 양원 의원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엔화 인하라는 경제 살리기 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끌어냈다.
   
   
   안보 무임승차 시대의 종언
   
   그동안 일본 국민들은 1978년의 제1차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에 대해서는 냉전시기 소련으로부터의 안보 우려와 방위의 필요성을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다. 1997년에 개정된 두 번째 가이드라인은 한반도 등 주변 국가의 안보 위기가 일본에 미칠 영향에 대비하자는 취지를 내세웠다. 이 시기에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나 핵실험이 있었다. 이로 인해 주변 사태가 일본 자체 안보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하여 국민들은 대승적 견지에서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지난 4월에 개정된 제3차 가이드라인은 일본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주변 지역이 아닌 전 세계로 넓히면서 미국이 공격받으면 일본이 공격받는 것과 동일하게 대처하고 지원한다는 이른바 집단자위권을 명문화했다. 일본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 미군을 후방에서 전투로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게이오대학의 헌법학자 고바야시 세스(小林節)는 “자위대의 법적 의미는 평화헌법 9조에 비추어 오로지 외부의 침략만을 막는 전수방위(專守防衛)의 경찰력이며 유엔의 평화유지(PKO) 목적을 위해 해외에 파견되는 자위대도 제2의 경찰력일 뿐 결코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미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집단자위권 행사가 헌법상 용인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회가 통과시킨 안보법들은 자위대의 군대화(軍隊化)를 의미하기 때문에 위헌”이라면서 안보법 반대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 그만이 아니라 다수의 법조인들이 “개헌 없는 안보법 제정은 일본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의 종언을 의미한다”면서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이러한 위헌 여부 논쟁보다는 안보법이 통과됨으로 해서 생활상에 나타날 변화를 우려하고 있다. 70년 동안 없었던 징집이 재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징집에 대한 우려, 방위세가 신설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담 증가에 대해 우려하며 반대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우려가 젊은 대학생들이 안보법 반대에 나서는 현실적인 이유다. 70년 동안 지속된 ‘안보 무임승차 시대의 종언’을 현실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학자로서 안보법 제정 반대에 나서고 있는 우에쿠사 가즈히대(植草一秀) 전 와세다대학 교수는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DNA를 아베가 잇는 것 같다”고 했다. 전범(戰犯)인 기시 전 총리는 도쿄전범재판에서 8년 징역형을 받고 스가모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미국이 소련의 아시아 침략을 막기 위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했다는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려면 아시아에서 일본을 활용할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자기 같은 정치인을 필요로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스가모형무소에서 풀려나와 전범으로서의 과거를 덮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 우파 정치인들을 끌어모아 자민당을 창당하고 총리가 되었다. 이후 미·일 안보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강행처리했다. 법안 통과 후유증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미국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하면서 일본의 진로를 개척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이 점에서 아베도 매우 유사하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총리 취임과 동시에 미국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미국을 이용, 일본 경제의 살길도 뚫으면서 일본 우익들의 오랜 꿈인 일본의 보통국가화, 즉 군사적으로 거세당한 일본을 군사력을 가진 정상국가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이 대목에서 한국도 미국의 필요를 미리 읽어내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베가 해석개헌으로 정국을 밀어붙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생각하는 국민들’ 다수의 반대와 아시아 주변국들의 우려 때문에 아베의 정치적 효용이 그리 오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아시아를 버리고 유럽을 지향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시대가 아니다. ‘아시아의 시대’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때문에 보통국가화의 고지에 일본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아베의 시대적 용도는 끝날 것으로 보인다.
   
   
   참회 빠진 히로시마
   
   일본 펜클럽 회장인 아사다 지로(淺田次郞)는 “일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폭을 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세계의 반핵운동에 앞장서는 것이 일본의 인류를 위한 참된 공헌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필자도 이러한 관점을 마음에 담고 1985년 일본 자민당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번 들렀던 히로시마를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그동안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 자료관은 많이 발전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과 실물을 보는 것보다는 자국말로 된 이어폰만 끼면 누구라도 손쉽게 원폭 피해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50여개의 전시물을 1시간가량 돌아본 후에 느낀 소감은 한마디로 미국은 가해자이고 일본인은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전시물은 일본이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피해자라는 인식을 보는 이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곳에 왜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마치 미국이 최악의 폭탄을 만들어 어린 초등학생이나 아녀자들을 처참하게 희생시킨 반인도적 집단인 것처럼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필자는 지난해 11월 중국의 난징대학을 강연차 방문하는 길에 1937년 난징대학살의 현장기념관을 들른 적이 있다. 이곳은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14만명보다 더 많은 비무장 양민 30만명을 남녀노소 구별 없이 인간 잔인의 극치라 할 만한 수법으로 도륙을 냈던 곳이다. 중국이 이곳의 간판을 ‘난징 학살’이 아닌 ‘난징 대도륙(南京大屠戮)’의 현장으로 표현한 것은 적절한 어휘 구사였다.
   
   일본이 진정으로 히로시마를 세계반핵운동의 허브로 만들려면 자료전시관의 정신적 바탕에 원폭을 받게 된 역사적 배경을 밝히고 참회하는 반성이 깔려야 한다. 패전 직전 일본 군부는 지는 전쟁임을 알면서도 ‘무조건 항복’이 아닌 ‘조건 있는 항복’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전체 일본인의 목숨을 걸고 본토 상륙 전쟁에서 결판을 내겠다고 미국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더 많은 인명피해를 막는 방도로 원폭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마치 자기네들이 피해자고 미국을 잔인한 가해자로 만드는 학습장으로 이곳을 활용하고 있다. 히로시마 자료 전시장이 일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미국에 대한 뜨거운 증오가 불타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일본을 이용하고 있지만 일본인의 내면에 도사린 반미정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일본의 용미탈미(用美脫美)의 전략을 미국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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