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주자 셋, 스타에서 영웅으로 변신해야
- 우리가 5년제 단임 대통령을 잘 뽑기 위한 조건
전상인 서울대학교 교수/사회학
대선 유감(有感)
19대 대통령 선거가 앞으로도 두 달쯤 남았다니 솔직히 지겹다. 명색이 ‘뉴스’라고 하면서 사실은 매일 똑같은 얼굴을 봐야 하고 항상 비슷한 얘기에 접해야 하는 ‘판박이’에 불과하기에, 5년 주기의 정치적 태풍이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입후보자들은 차제에 하나같이 개혁을 주창하고, 통합을 강조하고, 민생을 합창하지만, 우리는 미리 잘 알고 있다. 그와 같은 단골 레퍼토리는 5년 뒤에 또 다시 소란스럽게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언필칭 민주화 사반세기(四半世紀)를 맞이하는 해의 대통령 선거다. 1987년 이후 단임제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좋아도 5년, 싫어도 5년 동안, 특정인물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헌법 정신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대통령을 가져 왔던가? ‘앙코르’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대통령을 그동안 한 번이라도 겪어본 적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지배적 여론이자 대체적 민심일 텐데, 그렇다면 과연 이번에 뽑힐 대통령의 경우에는 희망과 기대를 걸어볼만 한가?
결론을 앞세운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우선 대선의 게임 방식이 과거에 비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정당의 존재감은 예의 찾기 힘들다. 특정 인물 내지 세력을 근간으로 하는 ‘캠프정치’가 여전히 정당정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캠프정치의 안방을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가 차지하는 것도 시나브로 한국정치의 정석(定石)처럼 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정치의 본령이 ‘투쟁’에서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명분으로 대학은 인기절정의 정치적 등용문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언제부턴가 잘만 ‘작당’(作黨)하면 ‘일격’(一擊)에 의해 누구라도 대통령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 균등의 나라가 되었다. 쿠데타처럼 말이다. 대통령의 자격과 조건을 갖추기 위한 준비나 경험, 혹은 경륜 따위는 별로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대선결과에 대한 예측이 한치 앞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그동안 꾸준히 누적되어 온 우리나라 대선의 ‘한탕주의’ 속성은 올해의 경우 오히려 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권력의 틀과 판이 크게 달라졌거나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재구성
한국의 정치권력은 2011년에 실시된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이전과 이후로 뚜렷이 대비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박원순 시장이 당선소감으로 “시민이 권력을 이겼다"고 말한 것처럼 정당이나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권 정치가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권력의 재구성은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 등에서 드러났듯이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세계화, 양극화, 정보화, 유목화, 개인화, 감성화 등으로 요약되는 우리 시대의 메가트랜드는 권력법칙을 원천적으로 바꾸고 있다.
세계화가 삶의 양식을 전반적으로 뒤흔들어 놓는 가운데 그것이 동반하는 양극화는 사람들의 분노를 크게 자극하고 증폭한다. 1%를 뺀 모든 사람이, 혹은 1%에 속하는 이들조차도, ‘루저’(loser)의식에 쉽게 휩싸이고 만다. 불만에 불안이 중첩된 결과다. ‘앵그리’(angry)한 상태로 사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로 ‘헝그리’(hungry)한 경우도 최근에는 크게 늘었다.
또한 신(新) 유목 시대를 맞이하여 지금은 개인화가 대세이긴 하지만, 개인이 결코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뭉치면 산다’는 것이 만고(萬古)의 진리라면, 오늘날의 ‘디지털 개인’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다. 정치학 교과서는 정당이 ‘권력의 집’이라고 가르치지만 요즘 세상에서 권력의 집은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집단지능의 도구이면서, 사람들을 서로 뭉치게 만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미지나 레토릭이 실체나 진실을 능가하는 감각과 매력의 시대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판단이 오직 재미에 달려있는 '연예사회'(the show business society)다.
제19대 대선은 바로 이처럼 권력관계가 사회적으로 극적으로 재구성되는 분위기에서 치러지고 있다. 크게 보면 권력의 현재 패러다임에서 미래 패러다임으로의 진화인 듯하나, 그것의 구체적 실체가 어떤 것인지, 그것이 과연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옳은 방향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런 만큼 당장에는 유권자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 일단 권력부터 잡는 게 능사로 생각될 터이다. 미래를 가불(假拂)하여 현재를 즐기고, 과거를 매도하여 오늘의 영광을 누리겠다는 생각이 앞설 법도 하다.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후보자들 간의 정책이 점차 수렴하는 경향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가 정치인에 대한 인기투표로 전락한 지 오래다. 권력의 연예화나 정치의 오락화로 인해 한국정치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후보들이나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 전문가들이나 모두 당면한 대선 승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최고 지도자의 역사적 사명이나 국가권력의 막강한 용처(用處)에 대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성찰이 없다. 바둑을 두면서 수는 읽지만 판은 놓치는 광경이라고나 할까. 지금 이대로라면 처음에 요란스레 등장했다가 국민적 원망(怨望) 속에 조용히 꼬리를 내리는 5년제 단임 대통령 ‘무책임제’의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
스타와 영웅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안철수 후보는 대통령에 출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시대의 정치적 스타(star)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그들은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 그리고 정보화 시대를 각각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한 인기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이 어디 보통사람의 실력이겠는가. 하지만 이들을 결코 영웅(hero)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 의존하는 스타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국민의 영웅이다.
언제부턴가 영웅의 존재가 폄하되는 세상이 되었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은 19세기 중반 서양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였지만, 20세기 후반 E. H. Carr 이후 영웅은 몰락 추세다. 민주주의와 영웅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라고 영웅이 없을 수는 없다. 후크에 의하면 인격적 성실성과 도덕적 통찰력, 그리고 진실성에 입각하여 때로는 ‘모험에의 소명’을 불사하면서 구체적 실천과 업적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은 분명히 실제로 존재한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영웅이 필요하며, 이 점에 관련해서는 현 시대, 우리나라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영웅이라면, 스타와는 무언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전설상의 영웅적 행각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신 극기와 진실, 그리고 용기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적 비범성과 수월적 리더십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령 19세기 독일 통일 및 근대화의 영웅 비스마르크는 시대의 큰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기꺼이 수용했다.
영국의 전시 내각 수상이었던 처칠도 국민들에게 장밋빛 약속 대신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을 오히려 요구했다. 미국의 영원한 정신적 대통령, 케네디도 비슷한 경우였다. 그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질문하라고 했다.
세기의 영웅들은 포퓰리즘, 즉, 대중영합주의를 특히 경계했다. 예컨대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산타클로스’ 같은 시혜적 방식의 사회복지를 거부했다. 대신 그가 강조한 것은 교육을 통한 자립과 자활이었다. 그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배려하면서 자선을 실천하고 했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는 평생 국민들에게 그릇된 환상이나 기대감을 조작하지 않았으며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행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덩샤오핑은 심오한 철학이나 복잡한 이론보다는 오직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밀어붙였는데, 기적을 미리 말하지 않은 채 실제로는 중국 현대사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영웅 기근에 빠져있다. 특히 민주화 이후 고만고만한 정치적 스타들은 속출했지만, 독립의 영웅, 건국의 영웅, 근대화의 영웅 계보를 잇는 통일조국의 영웅, 문화강국의 영웅, 세계대국의 영웅은 날이 갈수록 기대난(期待難)이다. 무릇 영웅이란 생물학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견되고 창조되는 존재라면, 우리 시대의 영웅 고갈 현상도 그 원인을 영웅의 역할을 인정하고 영웅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치사회적 기반의 축소에서 찾아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칼라일은 ‘영웅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만 진정한 영웅숭배가 가능하다고 했다. 성실한 사람만이 성실을 알아볼 수 있듯이, 영웅이 나타나려면 영웅에 적합한 세상 또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대선에서 영웅을 만나게 될 지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국민이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고 나라의 처지를 망각한 채, 그저 권리나 주장하고 혜택만 바란다면 이번에도 영웅의 도래는 애당초 글렀다. 대신 당장의 인기에 올인하는 정치적 스타를 만나 또 다시 ‘잃어버린 5년’을 후회하기 십상일 게다.
일찍이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절망과 불안감, 그리고 위기의식으로 가득 찬 지금 이 시대가 딴에는 난세라면 난세다. 그만큼 영웅대망론이 내심 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캠벨이 말했듯 영웅이 없는 사회는 꿈과 미래를 잃어버린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기대하는 진정한 영웅의 등장은 결국, 위선적 삶에 현혹되지 않고, 얄팍한 선심에 속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약속에도 넘어가지 않는 영웅적 국민의 탄생과 더불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의 수준은 최종적으로 유권자가 가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