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의 세번째 평양나들이
나의 세 번째 평양나들이
이 영 일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심양거쳐 평양으로
금년은 여느 해에 비해 봄이 더디 오는 것 같다.3월 중순인데도 날씨는 매우 쌀쌀하고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한민족복지재단의 방북
단은 북한의 민족화해협력위원회의 초청으로 인천공항을 3월 15일 출발, 중국의 심양을 거쳐 당일 평양으로 들어가는 3박 4일의 북 한여행에 나섰다. 나는 2001년 5월에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그 때는 먼저 중국의 북경으로 가서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얻은 후 고려항공 북경지사에서 항공권을 구입하고 호텔에서 1박한 후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코스였는데 이번에는 당일 평양으로 가기 때문에 경비와 시간이 절약되었다. 2002년 6월에는 전세기로 서해상을 돌아 바로 평양공항에 들어갔다.
이때는 실시간으로 따지면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평양에 당도했다. 이번 방북은 직행만은 못하더라도 당일 평양행 이기 때문에 중국호텔에 돈벌이를 시켜주지 않고 바로 평양에 갈 수 있어 좋았다. 심양공항에서 북한입국비자를 받는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
으로 예상했지만 재단 측에서 북한비자수속대행인에게 미리 인터넷메일로 사진과 신상기록사항을 보내어 작업해 두었기 때문에 휴대폰으로 심양도착을 알린지 30분도 안 되어 미리 받아놓은 비자를 조선족 대행인이 가져왔다. 북한비자는 입국 시에 제출하
고 돌아올 때는 북한당국이 다시 회수해 가는 이른바 쪽지비자이다. 이 때문에 한국여권에는 북한출입국사실의 기록이 전혀 남지 않는 다. 그러나 내가 받은 쪽지 비자 속에 나의 국적을 ‘남조선’으로 표시한 것이 언짢았다. 아직도 대한민국이라고 표시하지 않는 것이
통일지향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가 당도한 순안국제공항의 날씨는 한겨울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찬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는 초봄의 을씨년스러움이 전신에 느껴졌다.
두 명의 민화협 간부가 우리 일행을 영접했는데 귀빈대기실에서 채 20분도 안 되어 짐들이 나왔다. 맨 처음 평양에 왔을 때 내가 가지고 온 물건기록과 사실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두 시간 공항에서 기다렸던 때에 비하면 많이 개선된 것 같다. 그러나
평양에 들어가는 항공기 속에서 자기 백 속에 든 짐 내용과 소지한 돈의 액수와 종류를 자세히 기록하고 출국 시에는 기록된 돈과 물 건만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 입국통관신고서 제출요구는 예나 같았다. 서면요구대로 통관서류를 그대로 작성한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
이 아니다. 그러나 몇 차례 북한을 드나든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고지 곧 대로 모든 요구사항을 깨알같이 적지 않고 대충 내의 몇 벌, 세면도구, 미화 몇 달러 가량이라
고 써냈다. 그래도 아무 시비가 없었다.
퇴근길의 평양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해지기전에 공항을 빠져나와 다니는 차가 거의 없어 뻥 뚫린 아스팔트 대로 위를 막힘없이 빠른 속도로 평양 시 내를 향하여 달렸다.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서울의
러시아워의 교통체증을 생각하면 차가 잘 빠지는 것이 어쩌면 평양의 자랑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의 연변에는 포플러의 나목(裸木)들이 더디 오는 봄을 기다리면서 늘어서있었다. 잎사귀보다 먼저 꽃망울을 내밀면서 봄의 도래를 성급히 알리는 개나리도 요즈음의 이곳 날씨 같으면 추어서 몸을 움츠
렸을 것이다. 시내에 거의 다 달았을 때가 마침 퇴근시간이어서인지 버스정류장마다 머플러나 털 목도리를 두른 아낙들과 학생들, 두툼 한 점퍼나 파커 같은 겉옷을 입은 직장인들이 줄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닌 모에 카키색의
인민복차림을 한 사내들이 두서너 명씩 걸어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차창 밖으로 무궤도 전차버스들이 몇 대 지나가는 것이 보이고 고색창연한 전차가 아직도 교통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시내에 가까워 지면서 청색유니폼을 입은 여자교통순
경이 수신호로 오가는 차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다니는 차가 너무 적어서 여자교통순경이 도시의 장식품 같은 느낌을 주었다. 교통순경이 차를 기다리고 있을 만큼 한가한
평양거리에 멋진 폼으로 수신호를 보내는 교통순경의 진정한 용도가 무엇인가를 궁리하는 사이에 차는 벌써 시내중심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차가 평양시내 외곽인 모란봉 경기장근처에 이르렀을 때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남녀들이 도수체조를 하면서 집체로 훈련하는 모습이 시야
에 들어왔다. 옆자리에 앉은 K회장은 이들이 아마 태양절 매스게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
탄생일을 태양절이라 하여 국가적 경사로 기념하면서 세계제일을 자부할만한 메스게임, 카드섹션을 펼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의 숙소가 될 보통강여관을
향하여 달리는 도중에 또 다른 한 떼의 여자들이 열심히 집체훈련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은 평양체육관 마당인데 이들도 태양절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조금씩 붐비었다. 전에는 해가 진 뒤 공항에서
평양시내로 진입하였기 때문에 퇴근하는 평양의 직장인들의 행렬을 보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손에 가방을 든 사람, 등에 보퉁이를 멘사람,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우리 눈에 너무 익숙한 풍경이었다. 두툼한 옷에 머리를
모자나 목도리로 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남북한 간에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몇몇 지하철 출구 쪽에서는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북한 사회의 한 단면을 새롭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새로워졌다.
"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거리의 벽에 걸린 구호나 포스터의 선전문구들은 얼핏 보아 4년 전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나같이
북한연구에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느껴졌다. 지난번 방북 시 흔히 보았던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걷자”는 구호가 아무데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북한으로서는 일단 그 지루하고 길었던 고난의 행군시기가 끝났다는 뜻에서 그런 구호를 없앴는지 아니면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없앴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삶을 끝내고 싶다는 표시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구호는 그 홍보의 강도가 훨씬 더 늘어난 것 같다. 지금의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을 위해 영생탑을 세우고 그를 ‘영원한 주석’으로
결정하여 북한의 관직에서 주석으로 호칭될 수 있는 사람은 김일성 주석뿐이며 김정일 위원장도 ‘주석’으로는 호칭될 수 없게 되어있다. 김일성 주석의 자연생명은 끝났지만 그는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군림하게 되어 있다. 시내 한복판의 만수대언덕에 세워진 김일성주석의 금 동상, 전기가 태부족한 북한에서 영원히 밤에 불이 꺼지지
않는 금수산궁(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곳)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또 큰 호텔 내는 물론이거니와 리(里) 단위의 새마을 회관 같은 곳에도 김일성주의 연구소의 간판이 붙어 있다. 오늘의 북한에서 김일성주석은 북한주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는 존재로 상정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은 이제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평양거리나 고층건물의 벽에 걸려있는 정치 슬로건들의 또 다른 특징은 북한당국이 체제의 적이나 경계대상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을 떼려 부시자거나 남조선의 반동세력을 타도하자거나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인민을 해방하자거나 하는 등의 외 부 지향적 구호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지도부를 목숨으로 옹위하자’ ‘당이 결정하 면 우리는 한다’와 같은 내부지향적 구호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체제유지를 위한 통제시스템은 예전과 다름없어
그러나 우리 일행을 태운 마이크로버스가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식탁에 앉아 금후 북한체제기간의 일정을 설명 듣는 순간부터
내 마음의 기류는 또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2002년 방문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이 자기 체제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은 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호텔방에서 인터넷을 이용하여 나의 이메일을 열어 점검해보고 필요한 응답을 보내는데 그것을 할 수
없는 곳이 우리가 죽어도 소원이라고 노래하는 민족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라는 사실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또 국제전화를 걸어 집에 혼자 있는 아내에게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안부전화를 하고 수시로 국내소식도 전화로 물어보곤 했는데 그것을 할 수없는 곳이 북한이라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평양시내에 택시가 있지만 나를 담당하는 사람이 함께 동승하는 조건이 아니면 천만금이 있어도 택시를 탈 수 없고 식당 간판은 눈에
띄지만 담당자의 안내 받음 없이는 나에게 밥을 팔 식당이 없는 곳이 오늘의 북한이라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북한 동포들과 사 랑을 나누기 위해 방문하는 남한 동포들에게까지도 북의 통제시스템은 아직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낙담시켰다.
식탁도 계절 탓인지 전기부족으로 온실제배가 불가능해서인지 싱싱한 야채는 별로 없고 김장김치에 마른 해물구이 생선요리와 미역국이나
콩나물 국이 번갈아 나오고 계란찜에 요구르트가 제공되고 있었다. 북한 형편에서는 좋은 식단이나 고가의 호텔음식치고는 너무 빈약했 다. 또 북의 호텔에서는 양식이나 일식, 또는 취향에 따라 중국식을 선택적으로 사 먹을 수 있는 호텔은 없었다. 한식뿐이기
때문이다. 이 사정은 프랑스와 기술 제휴하여 대동강 안에 세운 양각도 호텔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또 가족들이 주말이나 집안 경사에 호텔에 모여 식사하는 풍경도 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나 외국인들만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북적대는 호텔 커피숍이나 예약 없이는 입장할 수 없는 큰 호텔 뷔페식당을 이곳에서 연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음 은 다시 쓸쓸해졌다.
처음으로 북한 시골의 협동농장을 탐방하다
우리의 이번 방북은 북한에 농업기술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의 P박사가 발명한 복토직파
기술을 북한에 전수해 주어 북한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복토직파란 P박사가 발명한 복토직파기를 트랙터에 부착한
후 트랙터를 운전하면 땅이 파이면서 그 판 골에 씨앗이 뿌려지고 동시에 규산질비료가 살포되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주는 작용을 하 나의 동작으로 하게
되는 데 이러한 기능이 12개의 고리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소수의 인원으로 넓은 면적에 정밀하고 과학적으로 파종함은 물론이거니와 비료의 유실도 방지하고 벼농사의 경우 건
답이나 습답을 막론하고 모내기를 할 필요 없이 농사를 짓는 장점이 있다.
한민족복지재단은 작년에 북한농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술 원조를 북측에 제안하였는데 북한 정무원은 세밀한 조사 후에 금년 봄
농사에 이 기술을 도입해보기로 결정함에 따라 한민족복지재단 대북 농업기술지원단의 방북이 이루어진 것이다.
보통강 호텔에서 일박을 한 후 우리 일행은 서둘러 조찬을 마친 후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40분정도 달릴 거리에 있는 평안남도 숙천군 약전리 협동농장을 향해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달렸다.
30분가량의 고속도로를 달린 후부터 비포장 시골길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차의 소음을 들으면서 봄기운을 지표에 빨들이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평안도의 들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특전이었다. 작년1년 간 남한에서 북한을 방문한 총 인원은 금강산 관광객을 제외하고도 8만여 명에 이르지만 북녘의 농촌을 우리 처럼 근접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이곳 저곳의 밭에서는 농부들의 일손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농부의 곡괭이들이 봄의 대지를 찍는 순간
놀란 흙덩이들은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여자들은 3인1조가 되어 쟁기질해서 뒤엎어 놓은 밭두렁에 골을 내는 가래질에 여념이 없 었다. 배토기만 한대 있으면 전근대적인 가래질을 하지 않아도 몇 정보의 논이나 밭의 고랑을 내는 것은 문제도 안 될 터인데 이곳은
가래질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다.
약전리 농장 가까이 왔을 때 일단의 군인들과 농민들이 서로 엉기어 호안공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새마을 취로사업현장을 연상시키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흙더미를 머리에 이어 나르는 것 같고 남자들은 땅을 파서 옹벽을 쌓고 있었다. 공사현장 근처에 는 비닐장막을 쳐놓고 북한 담배, 삶은 달걀 같은 것을 팔고 있었고 장막도 없이 두어 사람의 노점상들이 목판에 몇 가지 일용품을
올려놓고 들녘을 오가며 물건을 파는 것도 보였다.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앞으로 저 사람들이 북한시장경제건설의 주역이 될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평양시내에서 보지 못했던 좌판상을 이런 시골 내륙에서 처음 본다는 것은 실로 반갑고 놀라웠다.
북에서는 시장경제가 도시에서 보다는 농촌에서,특히 농산품시장에서 먼저 발전할지 모른다는 예감을 갖게 해주었다.
인간미 넘치는 북한 농가에 신농법을 전수하면서
약전리 협동농장에 당도했을 때 농장관리위원장을 비롯하여 군당간부, 농업부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일행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인천항을 통해 미리 보내놓은 복토직파기를 자기들이 조립해서 트랙터에 부착시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P박사는 이들의 열성에 감동하면서 기계성능과 이용법, 한국에서 가져온 찹쌀보리 종자의 파종면적과 관리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고
김포에서 복토직파로 벼농사에 성공한 C사장은 농기계의 이용관리상의 주의할 점을 경험을 토대로 설명해준 후 현장에서 직파실험을 개
시했다. 여기까지 올 때는 내가 지원 단장이었으나 농업현장에서는 트랙터를 직접 몰면서 직파의 시범을 보이는 C사장이 주연배우였고 P박사는 감독이었다. 이곳에서는 길가에서 바로 북한의 농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똑같은 크기의 농가가 길 쪽으로 10여 가구 늘
어서 있어 농가 속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는데 유리창은 거의 없고 비닐유리로 바람을 가리면서 살고 있었다.
작년 같이 추운 겨울에 삭풍을 어떻게 막았을까를 생각하니 몸이 오싹해졌다. 중국의 원조로 대안유리공장이 준공되었다니 이곳에도 유리
배급이 나올 날이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평야지대인 이곳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땔감부족이라고 했다. 연탄도 없어 볏짚이 땔감으로 쓰이기
때문에 고공품을 농가부업으로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농장관리위원장은 여자 분인데 매우 침착하고 열성적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농장 현황을 잘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북한곡창지대의 하나인 ‘열두 삼천리 벌’에 속하는 농장으로 과거 김일성주석 생존 시에도 종종
현지 지도 장소로 선발된 바 있는 우수농장으로서 6400명이 조합원으로 일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직파기술이 북한농업방 침으로 채택 실시되면 이 농장은 조합원 100명이면 족히 운영할 수 있는데 나머지 6300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해졌다.
나는 현장에 나와 있는 군당 간부에게 잉여조합원활용방안으로 당이 앞장서 조림사업에 이들을 동원할 것을 제안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산림청을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소관을 바꾼 일이며 4월5일 식목일 날 이외에 11월에 육림의 날을 지정하여 자기가 봄에 심은 나무 에 거름을 주게 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광화문 네 거리에는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라는 대형현수막을 걸어놓고 조림사업을 독려한
결과 지금의 남한 산야는 녹화되어 지구가 필요로 하는 산소공급에 크게 기여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일러주었다. 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매우 흥미 있게 들으면서 몹시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민족공조는 북한이 한국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하는 정치명분이었다
협동농장에서의 기술지도행사가 끝난 후 농장회관에 준비해 놓은 점심식사를 맛있게 나누었다. 북녘에서는 특찬 이라고 할 당고기 요리와
삶은 칠면조 알이 상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북녘을 방문할 때마다 통일교가 경영한다는 안산집이나 평양 당고기 하우스에서 당고기 요리를 먹었지만 이번처럼 맛있는 당고기 요리는 처음이었다. 특히 온실이 아닌 들에서 따온 달래나 냉이는 자연의 향으로 입속을 상큼
하게 했다. 식사가 끝난 후 P박사와 농장관리위원장이 주재하는 농장간부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기계성능에 대한 P박사의 질문에 하나같이 좋다는 반응을 보였고 앞으로 한국에서 트랙터나 직파기를 이 농장에 언제 얼마만큼 지원해줄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다.
특히 농장관리위원장은 단장인 나에게 농장에서 짐 운반에 필수적인 5톤 트럭 한 대가 필요하다면서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 문제는 북측 민화협과 의논해서 결론을 내자고 답했지만 자동차를 사달라는 요구는 4
년 전에도 있었다. 한민족복지재단이 운영하는 평양 서구 동성동 빵공장을 시찰했을 때 여자지배인이 그때도 단장으로 갔던 나에게 빵의 배달에 필요하니 차를 사달라고 해서 귀국 후 내가 속한 서울 영동 CBMC의 협력으로 스타렉스 벤을 한 대 사 보낸 일이 생각났다.
나는 이런 부탁을 받을 때마다 마음에 이름 모를 기쁨이 샘솟는다. 북한체제의 성격상 이런 부탁은 남한에서 온나에게 할 성질이 아니고
자기 정부에 해야 할 부탁인데 이런 부탁을 받게된다는 것은 북한의 오늘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어떻게든 힘자라는 데까지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농장이 보유하고 있는 농기구를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대소 농기구가 전부 한국에서 보내온 것이며 한
국의 상표가 그대로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북한이 남조선인민해방의 구호를 통치명분으로 강조할 때는 남한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시도 용납지 않았지만 이제는 남조
선인민해방아닌 민족공조를 강조하고 있어서인지 남한상표나 남한표시가 있는 물건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것은 변화라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또 이곳 농민들의 표정에서 남한사람들이 자기네들보다 훨씬 잘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으며 우리를 몹시 부러워하고 있음도 직감할 수 있었다. 북한의 내륙 깊은 곳의 농민들은 남한 실정을 전혀 모를 것이라는 일반인
들의 예단이 한참 빗나갔던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감내하면서 봄밭에 씨뿌리기 위해 가래질하는 아낙들, 직파기 기술을 터득하기 위 해 트랙터의 뒤를 밟고 따라다니면서 요점을 기록하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할 같은 민족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된다.
결국 민족공조란 경제적으로 앞선 남한이 도움을 받는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북측을 도와주는 정치명분임을 이번 여행에서 새심 깨달을 수 있었다.
느리지만 북한에도 변화는 찾아오고 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키는 가운데 귀국길에 올랐다. 다시 심양을 거치는 코스였기 때문에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 4시에 서울로 돌아왔다. 앞으로 남북한 간에 뭔가 바람직한 변화가 임박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기대가 내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4년 만에 다시 간 북한에 몇 가지 변화의 조짐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를 안내하는 북측 요원들이 태도가 달라졌다. 식사 때마다 우리와 함께 간 목사님에게 식 기도를 부탁할
경우 자리를 함께 한 북의 고위층도 이를 허용하면서 기도하는 동안 함께 조용히 묵념하고 앉아있었다. 함께 간 일행이 아침에 방에 모여 경건시간을 가지면서 찬송을 부르는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북한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을 돕기 위해 앞장서는 NGO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남한에서 올라간 사람들을 안내하고 협의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
은 사람들이 훨씬 덜 까다로워지고 친절해졌다는 사실이다. 체제유지의 시스템은 그대로 경직되어 있지만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남 한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로움을 이해하고 그러한 지유를 가능한 한 억제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메일 접촉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었다.
내가 K회장 편에 북한의 애국 열사릉을 방문해서 한중문화협회 초대회장이었던 조소앙(趙素昻)선생묘소를 참배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이를 까다로운 절차 없이 허가해 주었다. 평양 형제산 구역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 능으로 가서 조소앙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온 것도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고 변화의 체감이었다.
숙소에서 아침 일찍 보통강변을 거닐면서 산책을 하다보면 직장에 출근하는 북한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과거에는 이러한 마주침도
산책도 금지되었는데 지금은 이 정도는 눈감아 주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 “동무! 이 문제 놓고 한번 토론해 봅시다” 하는 소리를 이번 여행에서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요인은 북한주민들이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산다는 것을 도시뿐만 아
니라 시골농촌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국의 일부에서 퍼주기라고 비판하는 남한의 물자들이 북한주민에게 남한 실정, 그것도 북한보다 월등히 잘 산다는 것을 알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북한을 상대로 50개 이상의 민간 NGO단체들이 북한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고 정부에서도 식량과 비료 등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
러한 노력들이 누적되어 남조선해방론을 민족공조론으로 바꾸는 계기를 조성한 것은 아닐까. 북한이 변화하는 데는 아직도 더 많은 시간 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빨라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가 퍼주기라는 험담 대신에 남북한 동포 간에 사랑
의 나눔을 넓혀 간다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꾸준히 진실하게 접근해 간다면 머지않아 필요한 변화가 북한에서 나올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농업직파기술보다는 협동농장의 토지를 각 농가에 나누어 주어 농가생산청부제(請負制)를 실시하면 더 많은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의 교훈일진데 그러한 교훈이 북한에서도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3박4일간의 나의 세 번째 북한여행은 끝났다.
필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일본 츠쿠바 대학 역사인류학계 국제정치연구분야 객원연구원
국회의원(11대, 12대, 15대)국회문교공보위원장
국토통일원 정치외교담당관,교육홍보실장,통일교육원장(차관보)역임
한중문화협회 총재(현)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장(현)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현)
호남대학교 초빙교수(현)
한성대학교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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