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8주년을 보내면서
이 영 일(4.19당시 서울 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3년생)
오늘이 4.19혁명 58주년 기념일이다. 나는 4월회에 할당된 시간에 맞춰 아침 7시전에 수유리 묘소에 도착했다. 함께 나온 회장단과 함께 기념탑 앞에서 헌화와 묵념을 마친 후 묘소를 둘러보고 영정을 모신 곳에서 묵념으로 조의를 표하고 돌아왔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차내에서 읽은 신문에는 4.19에 관한 기사가 한 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매일 듣는 CBS뉴스에서도 4.19의 이야기는 없었다. 쓸쓸한 생각이 뇌리를 감쌌다.
그날의 시위에 앞장섰거나 총탄에 친구를 잃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제 4.19는 58년 전의 잊혀 진 이야기다. 아무리 헌법전문에서 그 정신을 기린다고 되었지만 4.19는 더 이상 뉴스의 소재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4.19묘소에도 대통령을 포함한 3부요인과 국가보훈처장의 개근상 타는 조화들이 놓여있고 그 뒷 열에는 지금도 그런 명칭의 단체가 있는가가 물어지는 4.19단체장들의 조화가 놓여있다. 우리들의 뒤를 이어 많은 인사들과 단체들의 참배가 이어지겠고 의례적인 행사가 있겠지만 뉴스가 될 수 없는 행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나는 묘소참배를 마친 후 가까운 친구하나를 더불고 프레스센터 지하실의 한방 찻집으로 들어와서 차를 나누었다. 1960년 4월 당시의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의사당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까지로 이어지는 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릴 때는 갑자기 젊은 기운이 솟구쳤다. 곧 독재정권의 총구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목숨이 날아갈 줄도 모른 채 힘차게 구호를 외치면서 달렸던 그날의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제 그 당시 20대였던 우리 모두가 80대의 연령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아! 우리 시대는 끝났구나" 하는 느낌이 깊은 슬픔으로 나를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아! 4.19는 이제 옛날이야기다. 아마도 19세기의 이야기일 것이다. 일어난 시점은 1960년대였지만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공간은 19세기의 그것이었지 않던가. 그 때 불의와 부정과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에게 시민들은 환호했고 최루탄에 눈물 흘리면 물수건을 빨아 눈자위를 닦아주던 시민들도 많았지만 이제 그 혁명현장의 주인공들은 다 고인이 되었거나 파고다 공원의 한 귀퉁이에 모여 앉자 공짜 지하철을 타고 어디선가 무료로 나눠준다는 점심정보를 따라 이동하는 군상들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은 불의(不義)에는 둔감하지만 불리(不利)에는 기를 쓰고 달려드는 반면 한국인들은 불리에는 둔감하지만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뛰어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사람들도 중국인들처럼 변해버린 것 같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만들고 뿌리고 수용하는 젊은이들 속에서 4.19적 리얼리즘은 찾기 힘들다. 매일 같이 쓸데없다고 느껴지는 이야기들로 인터넷 공간을 매우는 한국의 네티즌들도 4.19이야기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4.19는 그렇게 잊혀 지거나 망각될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진리의 상아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이 불의, 부정, 독재를 규탄하면서 잿빛 포도길 위에 피를 흘리면서 넘어질 때 전 국민들은 한목소리로 이 항쟁에 동참했다. 특정지역만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떨쳐 일어섰다. 전 국민이, 전 지역에서 한 목소리로, 한 주장으로 참여했다. 전 국민의 목소리가 하나였다. 새벽에 닭이 울듯이 대한민국 전역의 국민들이 새벽 닭 같이 한 소리로 울었다.
3.1독립만세운동이후로 두 번째로 맞이한 총화 된 국민항쟁이었다. Franz Meinecke의 이른바 ‘1789년의 위대한 정신’을 능가하는 ‘1960년의 위대한 한국정신’이었다. 이 투쟁을 통해 국민들은 주권을 되찾았다. 정권에게 빼앗겼던 주권을 국민들이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은 무엇보다도 국론통일이 아쉽고 국론통일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인데 시 4.19의 역사가 국내 뉴스에서 완전히 묻히고 만 것이야말로 정말로 개탄할 일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언론자유마저 빼앗길, 역사의식 없는 언론의 행태를 지극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혹자는 부마사태나 5.18의 광주를 예찬하고 촛불을 혁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4.19가 받는 위대한 정신에 비교될 수 없다. 그것은 특정지역이나 특정 세력이나 집단이 매스컴과 제휴한 대중선동과 조작으로 상당수의 국민들을 일시적으로 정치적 문맹(Political Illiteracy)으로 변화시킨 결과물들이기 때문이다. 광우병파동이 그렇고 촛불파동도 정변으로 변한 그러한 현상의 일종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괴테나 루터를 배출한 독일인들도 한 순간 정치적 문맹으로 변하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정권장악의 길을 열어 줬다가 자기 조국을 가장 비참한 패전국으로 몰락시켰던 역사도 우리는 기억 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4.19의 본질은 19세기적이었다. 부정, 부패, 독재가 청산되면 대한민국이 19세기적 과업이었던 국민국가로 발전하고 우리의 위대한 정신이 3.8도선을 넘어가 북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1인의 자유는 있지만 만인의 자유가 부정되는 북한 지역 동포들까지 주권자의 지위를 얻게 하면 민족국가의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것이 19세기적인 것 아닌가.
4.19이후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 사회적 신분집단으로서의 학생들이 통일의 주도세력이 되자는 취지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낭만적 통일운동은 5.16군사혁명정권의 철퇴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운동이 실패한 이후 NL이 주도한 종북 통일운동이 생기면서부터 통일을 바라보는 국민적 합의는 깨지고 말았다.
4.19가 58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4.19당시 세대들의 생각은 역시 19세기적이었다. 지금 20, 30세대들은 21세기적 지향을 내 보인다. 모두 공리적(功利的)이다. 전교조에게 자녀교육을 맡기기 싫으면 유학 보내면 된다. 교육의 국경이 사라진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어쩔 수없이 전교조에 맡기려면 전교조와 싸우는 학부모가 되어야 한다.
노조 때문에 기업하기 어려우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다. 경제적 국경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해외로 나가기 싫다면 민노총과 싸워야 한다. 문화의 국경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만큼 낡은 생각도 없다고 한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처럼 허구도 없다. 독재하고 싶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19세기형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어떤 지도자의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필요에 따라 국적을 선택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자주적으로 설계하려는 세대들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진정한 주권자는 권력에 얽매이거나 끌려 다니는 자가 아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지지하는 노선에 따라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되는 시대다.
이제 우리는 4.19의 메시지를 21세기의 요구에 맞도록 갱신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업은 평균 80대의 연령층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이는 사람을 늙게 만들면서도 낡게 만들기 때문이다. 올해, 4.19 혁명 58주년만큼 많은 생각의 숙제를 우리들에게 던져 주는 기념일도 많지 않을 것 같다. 김정은도 오는 4월 27일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함께 들고 나올 체제보장요구도 19세기형이 아닌 21세기형의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남북정상 간의 회담에서 뭔가 진전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4.19혁명 58주년을 쓸쓸히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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