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2국가체제와 공존질서 제도화 문제
(이글은 헌정지 2018년 8월호에 기고된 이영일 칼럼이다)
1. 들어가면서
1945년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분단 이후 우리 국민들은 너나없이 통일을 염원했고 모든 기념식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메시지는 통일이었다. 대통령이 누구이건, 어느 당이 집권했건 분단된 국가에서 통일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분단이 70년을 지나면서부터 통일에 대한 강조나 주장은 흔해빠진 국가 행사장의 수사(rhetoric)로는 들려도 우리가 기필코 달성해야 할 절실한 과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20대, 30대의 젊은 세대들은 북한이 강조하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을 하나의 허구(虛構)로 보고 민족이 같거나 비슷하다고 해서 꼭 단일국가로 통일해서 살아야한다는 논리나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민족이 같다고 하더라도 생활방식을 달리 한 가운데 여러 개 국가로 나뉘어 사는 경우도 많고 체제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성향에 따라 생활수준이나 발전수준도 달라지기 때문에 꼭 통일해서 하나의 국가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야한다는 논리에 승복하지 않는 것이다. 각기 제 갈길 가는 독립된 2국가로 분립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되거나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젊은 세대들의 사고방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부수준에서도 근래에는 공공연히 2국가 체제를 상정하는 표현들이 늘고 있다. 지금부터 46년 전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때만 해도 남북한 간의 합의문에 서명할 때는 혹시 통일을 포기하고 분단을 고정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남측이나 북측은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는 표현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상부의 명에 의하여 000”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1991년 남북한기본합의서를 발표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할 때는 남북한의 태도가 달라졌다. 상대방의 국호를 쓰고 관등성명을 밝혔다. 이 합의서가 발표된 후 주권국가만을 회원국으로 하는 유엔에 남북한이 각기 가입하였던 것이다. 이 뿐 만인가. 지난 4월 27일에 발표된 판문점선언에서는 “대한민국대통령 문재인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각각 정식국명과 직함을 들어내놓고 서명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즉각적인 통일보다는 분단된 두 개의 국가체제의 존속을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양자관계를 조절해 나가자는 접근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의 한반도에서 통일과 평화 중에서 남북한 동포들의 가장 큰 공감과 지지를 얻는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북핵문제로 미국이 대북군사옵션을 사용한다고 트럼프가 엄포를 놀 때 또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공포가 널리 확산되었다. 증권시장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크게 떠들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두려움 속에서 전쟁이 터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만은 기필코 막아야하고 또 막겠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옳은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문재인 정권에 그럴 능력이 있을지를 우려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이용하여 남북한 정상회담을 열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종결과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하는 한편 미국과 북한 간의 정상간 대화까지를 주선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남북한 동포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통일하자는 주장보다는 전쟁막자는 주장이, 통일 아닌 평화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비핵화로 흐르는 여론의 흐름을 전쟁을 막자는 여론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지자제(地自制)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었다.
어떻든 평화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모든 세대의 남북한 동포들이 똑같이 바라는 과제로 되고 있다. 현재의 남북한 상황에서 이처럼 평화가 국민적 열망이라면 우리는 2국가체제를 전제로 종전과 평화협정 문제를 마땅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2. 종전과 평화협정의 논의
지난 4월 27일 판문점선언에서 남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자는데 합의했다. 현재 한반도는 지난 65년 동안 평화협정이나 강화조약으로 대체되지 못한 휴전상태에 놓여있다. 국제법이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휴전협정이다. 동서 양진영간에 냉전이 끝난 지도 3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 휴전체제를 “정치적 수준의 새로운 협정”으로 대체할 여건은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한 간에 정상회담이 열리고 그 연장선에서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정상대화가 이어지면서부터 한반도에서도 휴전체제를 끝내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정부는 종전선언이 한반도 비핵화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체제보장을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 비핵화를 위한 분위기조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휴전체제를 대체할 평화협정체결문제도 제기되었다. 사실 평화협정문제는 이미 지난 2005년 제4차 6자회담의 결과물인 ‘9.19 공동성명’ 제4항에서 직접 관련된 당사국들이 한반도의 평화 체제를 논의할 것을 선언했는데, 이 또한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을 시사(示唆)한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한반도에서 2국가 체제의 등장이 불가피하다면 남북한 간에 공존질서의 제도화를 이룩하는 방법으로서 먼저 한반도 비핵화를 이룩하고 그 결과로서 평화협정을 통한 종전(終戰)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1945년 이전의 전통 국제 법에서 말하는 평화협정이 오늘의 남북한관계에서 꼭 필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1945년 이후 유엔이 국제평화와 안전문제를 관할하는 기구로 출범한 이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황판단과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관련 국가들의 합의를 통한 결의로서 전통적의미의 평화협정이 대치(代置)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과는 달리 유엔 깃 발 하에서 전개되었고 유엔 깃 발 하에서 전투행위가 끝났기 때문이다. 한국동란의 인과관계를 북한의 남침과 이에 대한 유엔의 참전을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안전보장조치로 보는 입장에서는 평화협정이 아닌 안보리결의를 통한 평화상태의 회복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처럼 무력침략을 자행하고 북한의 침략행위를 응원하기 위해 출병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유관 당사자들끼리의 평화협정을 선호할 것이다. 필자는 현시점에서 바람직한 수순은 남북한의 평화공존질서를 제도화시켜 나가는데 도움이 될 조치로서 비핵화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유엔체제 이후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종결시킨 대표적인 예로 흔히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1월 27일 ‘Paris Peace Accords’를 들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종전을 위해 일부러 평화협정을 체결할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미국이 반전여론에 밀려 조기 철군을 서두르기 위한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월맹과의 평화협정을 서둘렀는데 이 협정이 맺어짐으로 해서 그나마 유지되던 평화마저 깨지고 월남은 공산화되었던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북한의 핵 포기 등을 통해 대한민국과 북한 간에 ‘실질적인’ 평화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자연스럽게 북한을 국제법상 국가로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게 될 것이다. 즉 평화협정 체결로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핵 포기 등 ‘현상의 변화’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의 핵 포기 등을 통해 한반도에 실질적인 평화가 조성된다면 이는 북한이 UN안보리 결의 1718, 1874, 2094, 2270 등 관련 UN안보리 결의들을 충실히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며 한반도에 실질적으로 평화가 구축되었다면 UN안보리는 한반도에 이미 평화가 구축된 점을 확인하는 새로운 UN안보리 결의를 채택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더 좋은 평화협정이 있을까. 중국이 유관당사자로서 한반도평화체제에 꼭 발언권을 갖는 것만이 좋은 평화협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3.비핵화와 현실문제
남북한은 지난 4.27 판문점선언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핵을 완전하고 확인할 수 있고 되돌릴 수 없도록 폐기(CVID)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비핵화를 북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미•북 정상회담에서는 트럼프도 판문점선언처럼 CVID가 표시되지 않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동의하고 북한의 안전보장(Security Assurance)을 약속했다. 그러면 한반도의 비핵화와 체제보장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한반도의 비핵화는 두말할 필요 없이 남북한이 1992년에 합의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문자 그대로 실현함과 동시에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조치도 강구해 주는 것이다.
현재 비핵화협상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미국이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체제보장의 한 형식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이다. 미국이 취한 이 조치는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보다 훨씬 더 큰 양보를 미국이 북한에 해준 것이다. 한미합동 군사연습이 한번 씩 행해질 때마다 한미양국도 많은 경비가 들지만 거기에 대응해야하는 북한에게는 더 크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핵화의 진전에 따라 미국이 북한을 법적으로 승인, 연락사무소에 이어 대사급외교사절을 파견하고 한국과 군사정보교환으로 협력하고 있는 일본도 북한을 승인하고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이것 역시 북한의 안전보장을 위한 중요한 조치다. 평화협정보다 더 실질적 조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등의 선대의 유훈이라고 김정은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유사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할 핵우산의 원인인 한미방위동맹조약의 철폐와 주한미군의 철수까지를 포함하는 조치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4.27 판문점 선언에서 북한 측과 합의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개념 속에 주한미군철수와 한미방위동맹의 폐기까지가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언동가운데 크게 달라지는 측면이 엿보인다. 트럼프는 뜻밖에도 싱가포르 정상회담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이 말하는 종전과 비핵화문제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나아가 한국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 한미합동군사훈련도 중단한다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주한미군의 철수까지도 고려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정부는 전혀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점에서 종전이나 평화협정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의 궁극적인 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싹튼다. 정부의 명확한 입장표명이 요망되는 상황이다. 이런 흐름에 연해서 최근 진보 측 인사인 임동원 씨도 한 연설에서 “그동안 우리는 군사력 증강과 안보동맹 유지 등 안보 태세를 강화하면서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 즉 소극적 평화를 유지해 왔으나 이제는 적극적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적대관계의 뿌리인 군사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하며 이것 없이는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나 남북관계, 북미관계의 정상화도 기대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언동에 부합하려는 듯 우리 정부도 전방(前方)의 군사시설공사 중단, 전력강화예산의 감축이나 대공 군사조직의 재편성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가 그간 그것에 의지해서 안보와 통일을 생각하고 전망하던 모든 가정(Assumption)이나 준거(Frame of References)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이 북한의 상응하는 변화의 수반 없이 한국만의 일방적 조치로 추진된다면 국민여론은 크게 동요할 가능성이 있다.
4. 앞으로의 전망
한반도의 2국가체제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남북한 간의 평화공존질서의 제도화는 유엔동시가입부터 시작되었지만 통일논의에 눌려 그간 잠행해온 것을 양성화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하면서 현재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주도할 남북한과 미국이 평화공존질서를 제도화시켜 나갈 방도를 강구해야한다. 이런 절차의 하나로 필요하다면 종전이나 평화협정방식도 원용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북한은 현시점에서 트럼프 정부를 기만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진지한 협상파트너로 대하면서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 혹시라도 북한이 원교근공(遠交近攻)을 외교목표로 추구하면서 1380년 동안 한반도에 대해 갑(甲)질을 해온 중국을 믿고 미국과 앞으로 맺게 될 새로운 협력관계를 정립하는데 실패한다면 북한은 체제의 미래를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다. 핵무기는 다른 나라를 위협할 수는 있어도 실재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니며 비핵국가를 상대로 핵 공격을 위협한다면 국제사회의 제재는 물론이거니와 집단응징의 대상이 됨으로 해서 체제유지도 어려위질 것이다.
둘째로 한국은 북한의 능력에 대해 과대한 공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비핵화협상이 진행되고 비록 CVID만큼의 비핵화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큰 틀에서 비핵화가 합의되고 미국, 일본 등이 북한정권과 수교되는 새로운 환경이 마련되면 북한을 보는 우리의 시각과 전망을 바꿔나가야 한다. 협력과 교류를 통해 서로 Win-Win을 도모하는 지혜를 발현해야한다. 핵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철저히 뒤진 북한의 허장성세와 위협공갈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북한의 능력을 호랑이로 보고 우리의 능력을 고양이로 보는 사고방식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 우리의 참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종전이나 평화협정이 마련된다면 휴전선은 남북한의 경계선으로 바뀌게 되고 남북한 간의 내왕도 현재보다 훨씬 쉬워질 것이다. 또 지금 북한 내부형편도 더 이상 핵무기나 미사일개발을 밀고나갈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남한의 존재를 의식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인권이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갖게 할 개방(開放)에는 다소 몸을 사리겠지만 내부체제개혁은 피할 수 없는 상태다.
지금 내외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북한도 변하며 내외정세를 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하고 있다. 우리의 대북관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 이제 우리도 분단모순을 실현함으로써 분단모순을 극복할 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북한이 서로 공존 공영하는 길을 향하여 전진하다보면 남북한이 서로 잘사는 상태에서 하나로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통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