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은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서 대북지원사업에 열을 쏟았다.(2001-2007)
성 명 : 이영일(李榮一)
대별 및 소속정당(단체)
학력 및 경력
종교/취미 : 기독교
저서
상훈
이영일의 약력소개
본인은 전남 함평에서 출생,광주서석초등학교,광주 西中과 광주一高에 진학, 졸업하고 이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재학 중 3학년인 1960년 4.19혁명당시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데모를 主動하였다.
1961년에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하여 5.16군사혁명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1년 후 4.19혁명유공자로 인정받아 형을 면제받는 특사로 출감하였으며 대학졸업후인1965년에는 한일회담반대에 관련, 내란죄로 기소되어 6개월 간 투옥되어 있은 후 무죄로 석방되는 등 60년대는 反獨栽 民主鬪爭으로 510日을 서울 서대문 교도소에서 옥고를 견뎌야 했다. 그 후 동양통신사 외신부 기자,사상계 편집위원,기독교 방송 외신해설위원 등으로 언론계에 잠시 종사했다.
1970년대의 10년 동안에는 정부의 국토통일원에서 상임연구위원, 정치 외교정책담당관(2급)으로서 최초로 정부의 평화통일정책을 입안, 발전시켰으며 이어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북한정치연구관, 교육홍보국장 및 대변인,교육홍보실장(1급), 통일연수원장(1급)을 역임하였다. 공무원 시기의 업적을 평가받아 정부에서 紅條勤政勳章(1979)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5공 정권의 출범과 함께 현직 공무원을 정치권으로 차출 하는 계획에 의거,졸지에 민주정의당의 청년국장으로 발탁되었다가 제11대 국회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하였으며 제12대 국회에는 광주서구(남구포함)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 당선하였고 민주정의당 全斗煥 총재 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생긴 후에는 정치일선에서 후퇴했다.
일본에 건너가 츠쿠바대학 국제정치객원연구원으로 2년간 연구활동을 마친 후 귀국,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여당에서 여당으로 정권이 승계, 교체되는 수직적 정권교체가 아니고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대의명분에서 金大中總裁가 지도하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이 되었고 이어 1997년 광주 동구에 새정치국민회의의 추천을 얻어 보궐 선거에 출마,무투표로 당선함으로써15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새정치 국민회의가 민주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정치인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 NGO활동에 참여하였다.
NGO로는 1998년부터 맡아온 한중문화협회 총재로서 대중국민간외교에 힘쓰는 한편 2001년부터 한민족복지재단에는 재단이사로 참여한 후 공동대표의 책임을 맡아 평양 등 북한지역을 6회방문하면서 북한어린이 돕기,평양의학대학에 대한 의료품지원,평안남도 숙천군 약전리 협동농장 , 순안국영농장 등에 대한 비료 및 농기계지원 사업을 2006년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 후 부터 북한지원 사업에 대한 뜻을 접고 한중문화협회를 통한 대중국민간외교사업에 전력을 쏟고 있다.
한중문화협회에서는 중국낙후지역 어린이 심장병환자들에 대한 무료수술지원사업을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심장외과 및 내과의사들의 자원봉사를 얻어 실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60명의 중국극빈 어린이환자들에 대한 무료수술을 마쳤다. 둘째로 한국에 와 있는 중국유학생 및 노동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한중문화협회에 인권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지역별로 협회에 참여한 변호사들을 인권위원으로 위촉, 인권보호를 위한 법률지원에 힘쓰고 있다.
아울러 중국 유학생들을 분기별로 초청,그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필요한 지원으로서 의료지원을 비롯, 방학기 아르바이트 알선, 춘절(한국의 설)에 귀국 못하는 학생들을 전국 15개 지부들이 중심이 되어 춘절맞이 위로잔치를 해오고 있다.이는 일제독립운동시절 중국대륙에서 중국인들이 한국독립운동자들에게 베푼 우정의 빚을 다소라도 보은한다는 차원에서 계속실시해 나갈 계획이다.
또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회장으로서 2002년 아프간 전쟁 직후 의료봉사단을 이끌고 두 차례 아프간을 방문한 바 있고 현재도 아프간에서 유학생 12명을 초청, 대학에서 한국어를 포함한 기술교육을 배우도록 지원, 아프간 재건의 역군으로 육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아프간 전쟁 직후 정영숙 씨와 이영일 아프간 어린이 의료지원단장이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미즈에서 아무다리오 강을 건너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광경이다)
이러한 NGO활동이외에도 이영일은 광주 호남대학교의 초빙교수로 10년간 한국정치론, 북한정치론을 강의했으며(1996-2006) 전주우석대학에서도 중국전문 테크노대학원 초빙교수직을 맡아 중국정치론, 국제관계론을 강의해오고 있다.(2007- )
이영일은 한 때 열렬한 햇볕정책옹호자였다. 그것이 북한을 변화시키리라는 전망때문이었다.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 땅을 밟으며 대북지원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과 함께 김정일정권이 햇볕정책의 적용대상이 아님을 깨닫고 대북지원사업에서 손을 씻고 "햇볕정책의 종언"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의 어느 쪽이라도 핵보유를 시도할 경우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한반도 사태에 외세가 개입할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북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통일에는 엄청난 난관이조성되었다. 오직 비핵화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다. 북한의 조속한 핵포기의 결단을 촉구한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2003년에는 우주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대학에서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8년 호남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주요저서로는 1972년에 출간한 역서 협상의 전략(Fred Ikle's How Nations Negotiate)을 시작으로 1981년 분단시대의 통일논리(전예원),1987년 80년대와 한국정치(전예원), 1998년의 용서와 화해의 정치(전예원), 2008년 햇볕정책의 종언(전예원), 2009년 한국통일문제의 현주소(늘품 플러스)등이 있다.
성 명 : 이영일(李榮一)
생년월일 : 1939년 11월 17일
본 관 : 함평
출 생 지 : 전남 함평
본 관 : 함평
출 생 지 : 전남 함평
대별 및 소속정당(단체)
제11대국회의원(전국구) 민주정의당
제12대국회의원(광주서) 민주정의당
제15대국회의원(광주동) 새정치국민회의
제12대국회의원(광주서) 민주정의당
제15대국회의원(광주동) 새정치국민회의
학력 및 경력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석사)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대학 명예정치학 박사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급)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국토통일원 교육홍보실장
국토통일원 통일교육원장(차관보)
민주정의당 전두환 총재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현)
김대중대통령과 장쩌민중국주석간 정상회담 공식수행원
광주서중일고 총동창회장
사단법인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현)
우석대학교 테크노대학원 초빙교수(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석사)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대학 명예정치학 박사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급)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국토통일원 교육홍보실장
국토통일원 통일교육원장(차관보)
민주정의당 전두환 총재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현)
김대중대통령과 장쩌민중국주석간 정상회담 공식수행원
광주서중일고 총동창회장
사단법인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현)
우석대학교 테크노대학원 초빙교수(현)
종교/취미 : 기독교
저서
분단시대의 통일논리, 햇볕정책의 종언 외 3권
상훈
홍조근정훈장, 벨기에 대십자수교훈장
이영일의 약력소개
본인은 전남 함평에서 출생,광주서석초등학교,광주 西中과 광주一高에 진학, 졸업하고 이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재학 중 3학년인 1960년 4.19혁명당시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데모를 主動하였다.
1961년에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하여 5.16군사혁명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1년 후 4.19혁명유공자로 인정받아 형을 면제받는 특사로 출감하였으며 대학졸업후인1965년에는 한일회담반대에 관련, 내란죄로 기소되어 6개월 간 투옥되어 있은 후 무죄로 석방되는 등 60년대는 反獨栽 民主鬪爭으로 510日을 서울 서대문 교도소에서 옥고를 견뎌야 했다. 그 후 동양통신사 외신부 기자,사상계 편집위원,기독교 방송 외신해설위원 등으로 언론계에 잠시 종사했다.
1970년대의 10년 동안에는 정부의 국토통일원에서 상임연구위원, 정치 외교정책담당관(2급)으로서 최초로 정부의 평화통일정책을 입안, 발전시켰으며 이어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북한정치연구관, 교육홍보국장 및 대변인,교육홍보실장(1급), 통일연수원장(1급)을 역임하였다. 공무원 시기의 업적을 평가받아 정부에서 紅條勤政勳章(1979)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5공 정권의 출범과 함께 현직 공무원을 정치권으로 차출 하는 계획에 의거,졸지에 민주정의당의 청년국장으로 발탁되었다가 제11대 국회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하였으며 제12대 국회에는 광주서구(남구포함)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 당선하였고 민주정의당 全斗煥 총재 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생긴 후에는 정치일선에서 후퇴했다.
일본에 건너가 츠쿠바대학 국제정치객원연구원으로 2년간 연구활동을 마친 후 귀국,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여당에서 여당으로 정권이 승계, 교체되는 수직적 정권교체가 아니고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대의명분에서 金大中總裁가 지도하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이 되었고 이어 1997년 광주 동구에 새정치국민회의의 추천을 얻어 보궐 선거에 출마,무투표로 당선함으로써15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새정치 국민회의가 민주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정치인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 NGO활동에 참여하였다.
NGO로는 1998년부터 맡아온 한중문화협회 총재로서 대중국민간외교에 힘쓰는 한편 2001년부터 한민족복지재단에는 재단이사로 참여한 후 공동대표의 책임을 맡아 평양 등 북한지역을 6회방문하면서 북한어린이 돕기,평양의학대학에 대한 의료품지원,평안남도 숙천군 약전리 협동농장 , 순안국영농장 등에 대한 비료 및 농기계지원 사업을 2006년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 후 부터 북한지원 사업에 대한 뜻을 접고 한중문화협회를 통한 대중국민간외교사업에 전력을 쏟고 있다.
한중문화협회에서는 중국낙후지역 어린이 심장병환자들에 대한 무료수술지원사업을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심장외과 및 내과의사들의 자원봉사를 얻어 실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60명의 중국극빈 어린이환자들에 대한 무료수술을 마쳤다. 둘째로 한국에 와 있는 중국유학생 및 노동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한중문화협회에 인권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지역별로 협회에 참여한 변호사들을 인권위원으로 위촉, 인권보호를 위한 법률지원에 힘쓰고 있다.
아울러 중국 유학생들을 분기별로 초청,그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필요한 지원으로서 의료지원을 비롯, 방학기 아르바이트 알선, 춘절(한국의 설)에 귀국 못하는 학생들을 전국 15개 지부들이 중심이 되어 춘절맞이 위로잔치를 해오고 있다.이는 일제독립운동시절 중국대륙에서 중국인들이 한국독립운동자들에게 베푼 우정의 빚을 다소라도 보은한다는 차원에서 계속실시해 나갈 계획이다.
또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회장으로서 2002년 아프간 전쟁 직후 의료봉사단을 이끌고 두 차례 아프간을 방문한 바 있고 현재도 아프간에서 유학생 12명을 초청, 대학에서 한국어를 포함한 기술교육을 배우도록 지원, 아프간 재건의 역군으로 육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아프간 전쟁 직후 정영숙 씨와 이영일 아프간 어린이 의료지원단장이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미즈에서 아무다리오 강을 건너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광경이다)
이러한 NGO활동이외에도 이영일은 광주 호남대학교의 초빙교수로 10년간 한국정치론, 북한정치론을 강의했으며(1996-2006) 전주우석대학에서도 중국전문 테크노대학원 초빙교수직을 맡아 중국정치론, 국제관계론을 강의해오고 있다.(2007- )
이영일은 한 때 열렬한 햇볕정책옹호자였다. 그것이 북한을 변화시키리라는 전망때문이었다.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 땅을 밟으며 대북지원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과 함께 김정일정권이 햇볕정책의 적용대상이 아님을 깨닫고 대북지원사업에서 손을 씻고 "햇볕정책의 종언"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의 어느 쪽이라도 핵보유를 시도할 경우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한반도 사태에 외세가 개입할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북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통일에는 엄청난 난관이조성되었다. 오직 비핵화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다. 북한의 조속한 핵포기의 결단을 촉구한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2003년에는 우주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대학에서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8년 호남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주요저서로는 1972년에 출간한 역서 협상의 전략(Fred Ikle's How Nations Negotiate)을 시작으로 1981년 분단시대의 통일논리(전예원),1987년 80년대와 한국정치(전예원), 1998년의 용서와 화해의 정치(전예원), 2008년 햇볕정책의 종언(전예원), 2009년 한국통일문제의 현주소(늘품 플러스)등이 있다.